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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성지안내



1. 개요
동쪽으로 이란/아르메니아/그루지야, 남쪽으로 이라크/시리아, 북서쪽으로 불가리아/그리스에 접하고, 북쪽으로 흑해, 남쪽으로 지중해, 서쪽으로 에게해(海)에 면한다.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반도 전부, 보스포루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마르마라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의 발칸 반도, 동(東) 트라키아 지방에 걸쳐 있다. 초생달이 별을 안고 있는 터키 문장은 진보와, 전 국민의 마음의 일치, 독립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 국기에 그려져 있는 별의 유래는 제3회 십자군 원정 때에 왔던 리차드 사자왕의 기에서 딴 것이라고 하는데 그 별은 베들레헴의 별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별에 대한 다른 일설에 의하면 회교경전 코란 제816장에 나오는 알·타레크의 효성이라고도 한다. 또 초승달 문장은 14세기에 오스만 터키제국의 무라트 1세가 유고슬라비아 전선을 방문했을 때, 초승달과 별이 빛났다고 하는 일화에서 유래하고 있다.
국가명 터키 공화국(Republic of Turkey)
수도 앙카라(Ankara), 인구 약 500만명
면적 79만9천452㎢(한국의 7.8배)
인구 약 7,200만명
주요민족 주민의 90%는 13세기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했던 터키인들이며 소수민족으로 아나톨리아 반도 남동쪽에는 쿠르드족, 이스탄불에는 그리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주요언어 한국과 같은 알타이어 계열인 터키어로 인구의 약 90%가 사용하며 나머지 인구는 Kurdish, Arabic, Greek, Armenian 등 사용
종교 종교적으로 터키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돼 있지만 국민의 99%가 수니파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슬람국가
화폐 터키 리라(T/L) - 미화 1달러는 약 140만 터키 리라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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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36도와 42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나라처럼 4계절이 구분되어 있다. 여름에는 아조레즈 제도에서 발생하는 건조한 기류의 영향으로 아열대성 기온지대에 속하고 겨울에는 시베리아의 한랭한 고기압의 영향을 받는다. 해안의 온화한 기류와 대륙의 한랭한 기류가 충돌하여 내륙지방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연간 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는데 내륙지방은 해안지방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강수량이 가장 많은 계절은 겨울이며, 중부 아나톨리아는 봄에, 지중해/에게해/마르마라해 지역에서는 가을에 우기가 시작되어 봄까지 계속되며 흑해 지역에선 연중 비가 내린다.
주요산업 안티모니, 석탄크롬, 머큐리, 구리, 붕산, 철광석
전압 -
시차 -
1. 역사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위치로 11세기 중앙아시아로부터 투르크족이 이주해 오기 전 많은 나라의 문화교류와 흥망성쇠가 교차했다. 고대 오리엔트 문명서부터 그리스/로마, 비잔틴, 이슬람에까지 5,000년 역사의 문화유산이 살아 숨쉬는 동서양 문명 융화의 용광로이다.
터키의 전신 오스만 제국은 1299년 건국, 1922년 멸망할 때까지 600년 이상 서아시아, 발칸, 북아프리카 지역을 지배해왔다.
19세기 들어 서유럽의 교육과 기술, 제도를 도입한 탄지마트 개혁정치가 시도되나 결국 경제는 유럽에 압도되고 그리스와 이집트의 독립을 허용할 만큼 쇠약해졌다.
1차대전 때 독일 편에 가담했다가 패배한 오스만제국이 연합국에 의해 분할위기에 맞자 케말 무스타파는 1922년 술탄칼리프 제도를 폐지하고 터키공화국을 세웠다.
케말 무스타파는 2차 대전 때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했고 52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등 반공/친 서방 노선을 취했다.
60년, 80년 군부 쿠데타 이후 89년 30년 만에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한국과는 6.25전쟁 때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우방관계를 맺고 있으며 57년3월 수교했다.
현재 지중해의 키프러스 섬을 둘러싸고 그리스와 영유권분쟁을 벌이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는 쿠르드족의 분리독립 문제를 안고 있다.
터키는 36년 전부터 EU회원국으로 가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으나 키프로스 문제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EU회원국 그리스의 반대로 가입하지 못했으나 1999년 12월 유럽연합(EU)의 헬싱키 정상회담에서 15개 회원국은 터키에게 회원국 후보자격을 부여했다.
2. 주요 순례지
이스탄불
여행자들에게 세계의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인상 깊은 도시를 들라면 이스탄불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신비스럽다. 이스탄불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역에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기준으로 동쪽은 아시아에 서쪽은 유럽에 속한다. 이 두 대륙은 1973년 완공된 보스포루스 대교가 이어 준다.

콘스탄티노플, 비잔티움이라고도 불렀던 이스탄불의 특징은 돔과 첨탑이다. 이슬람교 국가인 터키에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많고 대부분의 모스크들이 돔과 첨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른 곳의 둥그런 돔과는 달리 펑퍼짐한 돔이 우리의 가마솥을 연상케 해 친근감을 준다. 이스탄불의 관광명소는 대부분 유럽쪽 구시가지에 있고, 특히 술탄 아흐멧 지역에 밀집해 있다.

1,000년 동안 기독교 교회 건축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던 소피아 성당과 이슬람 사원의 정수라는 블루모스크도 이스탄불과 이웃해 있다. 블루모스크 앞의 히포드롬 광장에는 이집트 카르나 신전에서 옮겨온 데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를 포함한 3개의 고대 기념물이 서 있다. 히포드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거대한 지하 저수장, 콘스탄틴 대제가 건설하고 유스티니안 대제가 확장한 '성컨 펠리스 시스테른 (Sunken Palace Cistern)'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건조물이다. 또 톱카프 궁전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온갖 보물을 구경할 수 있다. 그랜드 바자르는 이슬람교 문화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옥내 시장으로 약 4,400여 개의 상점이 있다. 옥내 시장 안에 65개의 거리가 미로를 이루고 있다. 그 밖에 이스탄불에는 돌마 바흐체 궁전을 위시하여 수많은 모스크와 박물관, 유서 깊은 명소가 많다.

교회사적으로 이스탄불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이은 ‘성령의 신성교리를 확정’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381년에 있었고, 이어 ‘성모 마리아는 단지 인간 예수의 어머니’일 뿐이라는 네스토리우스 교파를 단죄한 553년의 2차 공의회, ‘예수는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가 다 있다’는 양의론 교리를 선포한 680년의 3차 공의회, ‘동방교회 자주성을 주장하고 불가리아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요구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포시우스를 파문’한 869~870년의 4차 공의회 등이 열렸던 곳이다.

역사적으로 이스탄불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1,600년 동안 세계를 제패했던 3개 제국(로마, 비잔틴, 오스만)의 중심 수도로써, 도시의 이름도 제국의 변천에 따라 본래의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Constantine황제가 A.D. 330년 Byzantium을 재건하여 전 로마제국의 수도로 만들고, 이름을 Constantinople로 고쳤다.
393년 로마에서는 Honorius가 로마제국의 왕위에 오르고, Constantinople에서는 Arcadius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로마제국은 동-서로 완전히 분열되었다. 동로마제국((Eastern Roman Empire)은 일명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이라고 불리운다.


정치적인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분열은 기독교의 분열도 가져왔다. 서로마 제국은 Roman Catholic Church로 계속되었고 동로마제국은 Eastern Orthodox Church로 분열되었고, 1054년에 그 분열은 공식화되었다.

Byzantine 제국은 Justinian 황제(527~565) 때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고, 특히 건축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Byzantine제국은 1100년 이상 계속되었고, 1453년 Constantinople이 Sultan Muhammad Ⅱ에게 함락되어 Ottoman Turkey 시대가 된다.
* 성 소피아(St. Sophia)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성 소피아 성당은 높이가 56m, 동서의 폭은 31m, 남북의 폭은 33m로서 내부에 들어가 보면 이 건물의 중심이 되는 기둥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건물은 기둥이 떠받치는 구조로 되어있지만 이 건물만은 그렇지 않다. 천장에서부터 반구 형태의 지붕이 서로를 떠받치는 15층 높이의 거대한 둥근 돔(Dome)이 있고, 그 둘레에 40개의 창문이 있고, 아름다운 mosaic 성화들이 장식되고 있다.
Byzantine 건축으로 가장 완벽하게 조화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는 이 건축양식은 현재의 건축기술로도 쉽게 흉내낼 수 없다고 한다. St. Sophia란 "하느님의 지혜(Divine Wisdom)"란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지혜라는 뜻이다.
St. Sophia대성당의 현재의 건물은 그 자리에 세워진 세 번째 건물이다.
360년 Constantine황제의 아들 Constantius는 St. Sophia를 건축하였다. 그러나 404년 불에 타 파괴되었다. 그 후 415년 Theodosius황제 때 다시 재건되었다. 그러나 532년에 일어난 민란사건으로 소실되었다. 민란사건이 진압된 후, Justinian황제는 곧 파괴된 St. Sophia를 다시 재건(532~537년)하였다. 따라서 현재의 건물은 Justinian황제 때 건축된 것이다.(538년 봉헌)
이 성당은 콘스탄티노플을 로마보다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황제의 의지와 트랄레스의 건축가 안테미우스(Anthemius)와 밀레도스의 수학자 이시도루스(Isidorus)의 완벽한 설계로 이루어졌다. 성 소피아 성당은 동로마 제국 시대 그리스 정교회의 본산지였으나, 1453년 Ottoman제국에 점령당한 후 이슬람교의 사원인 Mosque로 바뀌었다. 대성당 꼭대기의 십자가는 이슬람교의 초생달 표지로 대체되었고, 대성당 안은 Moslem 기도처(Islamic Prayer niche, '미랍'(mihrab)이라고 부르며, 방향은 반드시 메카쪽을 향한다)를 만들었다. 또한 내부의 모자이크 장식은 일부 파괴되거나, 회칠을 해서 없애버렸다.
Moslem에 의해서 훼손된 Mosaic 복원작업은 1840년대부터 일부 시작되었고 1931년에 들어와서 미국의 T. Whittenmore에 의해서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진행되었다.
복원된 모자이크 벽화에는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마리아 상과 유스티아누스 대제가 화려하게 묘사된 그리스도 좌상은 특히 유명하다.
당시 모든 권위와 신망을 걸고 당대 최고의 기술을 동원했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이 성당을 완성시키면서 감격하여 “솔로몬 왕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 블루 모스크 (Blue Mosque)
이슬람 사원인 블루 모스크는 Sultan AhmetⅠ(1609~1616 제위)가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더 크고 웅장한 모스크를 짓기 위해 St. Sophia 바로 맞은편에 이 모스크를 건축하였다. 따라서 이 모스크의 공식적인 이름은 Sultan Ahmet Mosque이다. 일반적으로 Blue Mosque라고 불리는 이유는 내부에 푸른 타일로 아름답게 장식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스만 제국 술탄들은 종교적인 중요한 선언을 이곳에서 가졌고 종교휴일에는 이곳에서 축제와 메카를 향한 순례의 출발지가 되었다. 둥근 천장의 4개의 돔과 6개의 높은 첨탑, 가지각색의 빛깔과 무늬가 정성스럽게 짜여진 바닥의 양탄자가 있는 대형 mosque로, Ottman 제국의 영화를 자랑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흐멧 1세가 메카로 떠나기 전에 건축가에게 황금으로 된 Minaret(첨탑)들을 세울 것을 명령하였으나 당시 재정적인 형편으로 보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건축가는 재치를 발휘하여 터어키 말로 금(GOLD)은 알틴(ALTIN)이고 여섯(SIX)은 알타(ALTI)이므로 명령을 따른다는 뜻으로 6개의 돌 첨탑을 세운 것이라 한다.
* 토카피 궁전(Topkapi Palace)
Golden Horn 해협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세워진, 현존하는 오스만 제국의 거대한 궁전으로 15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Ottoman제국의 황제(Sultan)들이 살던 곳이다. 궁전의 이름은 ‘문에 대포가 있는 궁전’이라는 뜻으로 Top(대포) Kap(문) Saray(궁전)이라 불려진 곳이다. 그 위치가 군사 요충지로서 동서 교역의 접점인 보스포르스 해협을 향해 포를 포진해 놓았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1459년에 착공되어 여러 술탄들의 증축했으며, 그 규모는 전성기에 6000여명이 살았을 정도로 컸으나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1923년 터키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 돌마 바흐체 궁전(Dolmabahce Saray)
톱카프 궁전에 이어 세계의 궁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사치의 극을 이룬 상상을 초월하는 궁전으로 원래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1814년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31대 술탄인 압둘 마지드에 의해 1843-1856년에 석조로 재건된 궁전이다. 이 궁전은 유럽스타일의 석조 궁전으로 유럽에서 보내온 수많은 헌상품과 선명한 색채가 그대로 남아있는 사방의 벽들은 사치스런 생활과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다. 궁전의 총면적은 1만 5000㎡. 탁 트인 홀에 매달린 수정 샹제리아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받은 헌상품으로 무게만도 4.5톤이며, 750개의 촛불 램프가 켜져 있다. 궁전내의 시계는 이곳을 관저로 사용하다 1938년 11월 10일 집무 중 숨진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를 생각하며 숨진 시각인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궁전의 이름은 ‘문에 대포가 있는 궁전’이라는 뜻으로 Top(대포) Kap(문) Saray(궁전)이라 불려진 곳이다. 그 위치가 군사 요충지로서 동서 교역의 접점인 보스포르스 해협을 향해 포를 포진해 놓았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1459년에 착공되어 여러 술탄들의 증축했으며, 그 규모는 전성기에 6000여명이 살았을 정도로 컸으나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1923년 터키공화정이 수립된 이후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이 박물관에는 시계에 많은 흥미를 가졌던 Sultan들에게 구라파의 여러 나라 왕들이 기증한 시계수집으로 유명하다.

* 그랜드 바자르(Kapali Carsi)
그랜드 바자르는 터키어로 ‘카팔르 차르쉬’라고 한다.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의미 그대로 실내에 있는 상점가이며, 출입구가 20여 개나 되는 터키 민족적 향기가 감도는 토산물 쇼핑 천국이다. 작은 상점들이 무수하게 들어차 있지만 대부분 같은 품목끼리 몰려 있다.

* 지하저수지(Yere Batan Saray)
술탄 아흐메트 지역 입구에서 밑으로 층계를 내려가면 대저수지 예레 바탄이 나온다. ‘예레(Yere : 땅에)’ ‘바탄(Batan : 빠지다)’이라는 의미로 532년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세로 140m, 가로 70m, 높이 8m 정도로의 크기로 336개의 코린트(Corinth) 양식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물은 아타튀르크 거리에 있는 동로마 시대의 수도교에서 끌어 왔는데, 오스만 시대엔 톱카프 궁전에서 거주하던 술탄들의 식수로도 공급되었다고도 한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Antakya)
안타키아의 옛 지명은 안디옥(Antioh)이었고, 공동번역 성서에는 안티오키아로 표기되어 있는 이곳은(이하 안티오키아로 표기) 예루살렘에서 약 500km 북방에, 지중해로부터 약 30km 내륙에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에 있다.
고대시대에 안티오키아는 오론데스(Orontes)강이 북서쪽으로 흘러내리며 기원전 300년 Alexander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장군 Seleucus Necator는 기원전 312년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우고, 자기 아버지의 안티오코스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케이아라고 명명했다. 안티오키아는 중동의 정치, 경제, 학문, 환락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기원전 64년에 로마제국에 정복당하였고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안티오키아는 사회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대도시였다. 로마제국에서 주민이 100만이 넘는 도시는 제국의 수도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고, 안티오키아는 시리아 지방 수도로서 50만명의 시민이 살았다.
* 그리스도 공동체
당시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 고르넬리오 가족에게 전도한 적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였다(사도 10). 그러나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가 안티오키아에서 공공연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사도 11, 20), 그 결과 안티오키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혼성교회가 생겨난 것이다(사도 11, 19-20)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볼 책임자로 키프로스 섬 출신 보조 사제 바르나바를 파견하였다.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있던 바울로를 초빙하여 만 일년 동안(44~45년경) 그와 함께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았다.(사도 11, 19-26)
안티오키아는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바울로는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지역에 광범위한 전도여행을 하였는데 안티오키아를 전도의 거점으로 삼고(사도 13, 4), 배편을 이용할 때면 이곳 항구를 이용하곤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도 바로 이곳이 처음이었다(사도 11, 26). 사도 교부(Bishop) 이나시우스가 여기서 주교로 재직하다가 A.D. 110년경 로마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4세기 경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중요한 총대주교좌가 되었다.

* 베드로 석굴 성당
이곳에서도 바울로와 교부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근처에 ‘성 베드로 석굴성당’이 있지만 베드로, 바울로 시대에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모여 미사를 드린 곳이라는 전설이 깃들어 있을 뿐이다. 이 석굴 성당 정면은 프랑크족 십자군들이 안티오키아 공국을 건설했을 때(1098-1268년) 다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당은 높이 13m, 넓이 9.3m, 길이 7m로 변색된 동굴 내부는 어둡고, 바닥은 모자이크 십자형으로 되어 있고, 제대 위의 벽에는 베드로 사도가 천국 열쇠와 두루마리 성서를 들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박해자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안쪽 구석에는 허리를 굽히고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와 입구가 있다. 통로 길이가 약 4km이며, 중간에 여러 통로로 갈라져 있어 초대 교회 신자들의 도피처로 이용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 안티오키아 사건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기록된 안티오키아 사건의 경위는 이러하다.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가 있고 난 후 베드로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였다. 당시 그곳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유대인들이요, 또 일부는 이방인이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함께 모여 공동체 회식을 갖곤 했다. 곧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거행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두 부류의 신도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손수 공동체 회식과 성찬례를 집전하였다.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에 알려지자 소동이 일어났다. 교회의 총책임자인 베드로가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를 해선 안 된다.”는 규정을 어겼으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이를 나무라자 베드로는 그만 이방인 교우들과 회식 겸 성찬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베드로의 영향을 받아 안티오키아 교회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마침내 바르나바 조차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끊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베드로의 일관성 없는 태도 때문에 안티오키아 교회가 양분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에 바울로는 분연히 일어나서 그곳 교우들 앞에서 공공연히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었던 것이다. 곧 율법의 규정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일치가 깨어져서는 안된다는 논리였다.

다르소
바울로의 탄생지 다르소는 소아시아(터키) 남동쪽 해안 길리기아 관구에 있는 도시이며, 길리기아 페디아스의 주요 수도이다.
기원전 323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 대왕의 막료로서 시리아에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운 셀레우코스 니카토르(Seleukos Nikator)가 다르소 일대를 차지했다. 그래서 다르소는 자연스레 동서 문화와 언어의 교차지가 되었다.
(기원전 333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다르소를 관통하는 치드누스강에서 목욕하다가 익사할 뻔한 일화도 있다.)
기원전 64년 이곳은 로마에 합병되어, 기원전 57년에는 길리기아(Cilicia)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으며, 기원전 50년에는 로마의 달변가 키케로(Cicero)가 길리기아 총독으로 이곳에 부임했다. 기원전 41년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장군이 내방해 면세 혜택을 베풀었는데, 이때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아름다운 여신 비너스로 분장하고 치드누스강으로 배를 타고 와서 안토니우스 장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 바울로의 탄생지 다르소
바울로는 다르소에서 태어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필립 3, 5), 개심 후 삼 년이 지난 36년경에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를 만나본 다음(갈라 1, 17~19), 고향 다르소로 돌아가 약 8년 동안 지냈다(사도 9, 30). 44년경 그는 시리아와 안티오키아 교회의 일을 돌보던 바르나바의 초빙을 받아 안티오키아로 가 만 일년동안 그곳 교회의 신도들과 함께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사도 11, 25-26).

예제2차 전도여행 때(50~52년 경)도 바울로는 고향 다르소를 거쳐갔음에 틀림없다. 이 여행 경로를 보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타우루스(Taurus) 산맥을 넘어 제1차 전도지역(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을 다시 찾아본 다음, 훨씬 북쪽에 자리잡은 갈라디아 지방으로 갔다. 그런데 그 험준한 타우루스 산맥을 넘자면 별 수 없이 다르소를 관통하는 치드누스(Cydnus, 지금의 타르수스 수유)강을 따라 협곡(길리기아 관문)을 지나거나 다르소를 지나 실리프케(Silifke) 항구에서 칼리카드누스(Calycadnus, 지금의 괵수)강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러니 어느 경우에고 그의 고향 땅 다르소를 거치게 마련이었다. 제3차 전도여행 때(53~58년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바울로는 세 차례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바울로가 로마의 파견대장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혀 "나는 길리기아의 다르소 출신 유대인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이라고 밝혔다(사도 21, 39).

다르소는 일찍이 주교좌가 있었는데, 그중 안티오키아 출신 디오도루스 주교(327년 다르소 주교, 394년경 사망)가 가장 돋보인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아리아니즘, 배교자 율리우스 황제(361~363년 재위), 예수의 인성을 소홀히 한 아폴리나리우스(시리아의 라오디게이아 주교, 310~390년경 생존) 등을 상대로 싸워 정통 교리를 수호했다. 그는 안티오키아 신학파의 신학자로서 자의적, 역사적 성서 주석을 주창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 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7년경~407년), 몹수에스티아(아다나에서 안티오키아쪽으로 28킬로미터 떨어진 야카피나르 마을)주교 테오도루스(350년경~428년)를 길러냈다.

다르소는 641년부터 아랍인들의 침공을 받기 시작하면서 점점 쇠퇴했다. 지금 시민의 수는 10여만 명 정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곳에서 바울로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도심에 '바울로의 성문(일명 클레오파트라 성문)'이라는 게 있으나, 이는 바울로 시대 이후에 세운 로마식 성문이다. 성문에서 가까운 곳에 바울로 생가 우물이라는 것도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다르소 시청에서 순례자들을 끌어들이려고 어느 부잣집 우물에다 그런 딱지를 붙였을 뿐이다. 다르소의 중앙에 자리잡은 울루 모스크(Ulu Camii)는 성 바울로 주교좌성당 터에 세운 것이다.
가빠도기아(Cappadocia)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가빠도기아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남동쪽으로 280km 떨어진 네브쉐히르 도시 일대의 광활한 고원 지대이다. 이 지역은 원래 사암지대엿으나 신생대 3기 화산으로 인하여 화산재가 응회암이라는 암석으로 굳어졌고, 오랫동안 지각 변동과 풍화작용으로 생겨난 원추형의 현상은 약 800㎢를 이루고 있다. 이곳의 지하동굴은 기원전 1200년 전부터 서기 17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서기 14~37년 재위)가 가빠도기아 왕국을 멸하고 로마 제국 영토에 편입할 때까지 수많은 왕국 교체과정에서 전쟁 패잔병들이 소규모로 토굴을 파고 은신해 살면서 시작됐다. 그 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가 심해지자 소아시아 반도를 비롯한 각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몰려와 지하 동굴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 그리스도 지하교회 역사
가빠도기아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로마 박해와 7세기 아랍의 침입, 8세기 전후 동로마 내부 갈등으로 성화의 지지자들이 우상숭배자로 몰려 박해를 받자 이곳으로 도피해 지하 동굴교회를 만들고 성화를 그렸다. 성화가 처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1-2세기의 것은 거의 다 훼손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7-9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동굴교회는 바위 속 터널을 통해 다른 교회들과 거주지로 연결되어 있고, 또한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요소마다 둥근 돌로 만든 문을 두어 외부의 침입이 있을 때 통로를 막았으며, 이웃과 이웃의 통신 수단으로 비둘기를 이용하였다.
가빠도기아 지역은 신약성서에는 2번 나온다(사도 2, 9; 1베드 1, 1). 서기 30년 5월경 예루살렘에서 베드로 사도가 그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할 때 가빠도기아에서 순례 온 유대인들이 있었다 한다(사도 2, 9). 그런가 하면 1세기 말엽에 쓰여진 1베드로 서 서두에서 지금의 터키 여러 지방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를 전하는데, 그 가운데 가빠도기아도 등장한다(1베드 1, 1).
서기 4세기에 그리스도 신학과 영성이 약진한 곳은 콘스탄티노플도, 에페소 주변 아시아도 아닌, 놀랍게도 터키 중부의 외진 곳인 가빠도기아 속주였다. 이때 이곳 가빠도기아에는 3명의 교부가 혜성처럼 나타났으니, 곧 가빠도기아의 수도 가이사리아(지금의 카이세리)의 주교 바실리우스, 나지안조의 주교 그레고리우스, 니싸의 주교 그레고리우스이다.

* 바실리우스(Basilius Magnus)
바실리우스(Basilius Magnus 329/331~379년)는 수녀원장으로 생을 마감한 성녀 마크리나가 여동생이었고, 두 남동생도 주교였다. 그는 가이사리아, 콘스탄티노플, 아테네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352년 가빠도기아로 돌아와서부터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그는 철두철미한 삼위일체 교리신봉자로 그가 375년에 탈고한 ‘성령론’ 덕분으로 381년 제 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령의 신성교리’가 통과되었다. 한편 그가 저술한 [수도규칙서 소본(regulae brevius tractatae)]과 [수도규칙서 대본(regulae fusius tractatae)]은 동/서방 수도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azianzenus)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azianzenus 329/330~389/390년)는 45년간 나지안조 교우촌의 주교로 재임한 그레고리우스와 성녀 논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레고리우스는 379년 황제로 등극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총애를 받아 380년 11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발탁되어 381년 5월 제 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의장으로 취임하여 공의회를 주도했다. 그러나 공의회 일부 교부들이 주교좌 이동을 금지한 니케아 공의회 규정을 내세워 그레고리우스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직을 문제삼자, 그는 공의회 중에 그 유명한 ‘고별사(연설 42)’ 를 하고 나지안조로 돌아가 버렸다.
그는 사상적으로 삼위일체의 교리와,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Theotokos)'이시라는 존칭을 강력히 옹호했다. 그는 바실리우스와는 달리 무척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으로 교회행정과 대인 관계에 매우 서툴러 한평생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고 피해의식에 젖어 지냈다. 그래도 뛰어난 문장력으로 연설문과 시, 서간문에 두루 능했다. 오늘날 '나지안조'를 찾아가면 미루나무와 밀밭사이에 큰 건물 주춧돌만 남아 있다.

* 니싸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니싸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335/340~394/395)는 성녀 마크리나와 가이사리아의 대주교 바실리우스의 동생이다. 그는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참석하여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확정한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여 ‘성령의 신성 교리’를 확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가빠도기아의 세 주교 중에서 가장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녔던 그는 성서를 우의적으로 해석한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아 성서를 신비주의적으로 풀이하곤 했었다. 예를 들자면 '모세의 한평생'에서는 영혼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과정을 논하고, '아가서 주석서'에서는 영혼과 하느님의 합일을 논하였다.


* 괴뢰메
괴뢰메 계곡은 천연의 자연 조각품으로 환상적이다. 이곳은 지상 바위 동굴 속에 프레스코와 성화들이 교회마다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 많이 파괴되었으나 토카르트 교회 같은 고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어두운 교회 천정과 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활과 기적들,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이 그려져 있다.
대표적인 동굴 성당은 바실리우스 성당(작은 성당), 엘말러 킬리세(사과 성당), 성녀 바르바라 성당, 열라늘러 킬리세(뱀성당), 카란르크 킬리세(어두운 성당), 크즐라르 마나스트러(수녀원), 엘 나자르 성당 등이 있다.
괴레메는 그리스 중부의 수도원 집성촌 메테오라, 아토스와 더불어 가장 인상깊은 수도원 집성촌이다. 1923년 터키와 그리스가 맺은 조약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수도자들은 모두 그리스로 이주했다.


* 카린릭 동굴 교회
교회 내부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시는 모습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 나귀를 타고 가시는 모습, 또한 아기를 앉고 있는 마리아 등이 그려져 있다. 이 성화는 10-13세기에 그린 것들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 엘마라, 킬리세 동굴교회
교회 내부는 십자가를 메고 로마 군인들에게 끌려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성모 마리아 상 등의 성화들이 벽과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성화들은 대부분 7-9세기 때 그린 것으로 소석회에 모래를 섞어 바르고 채색한 프레스코화로 정교하게 그려졌다. 외부침입과 풍화작용으로 많이 손상된 상태다.

* 데린쿠유와 카이막카르(지하도시)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데린쿠유와 카이막카르 지하도시의 형태는 비슷하다. 지하 120m까지 내려가는 대형 지하도시는 현재 8층까지 내려갈 수 있다. 피난민이 늘어 날수록 더 큰 공간의 넓이가 필요하게 되자 옆으로 혹은 지하로 계속 파 들어가 복잡한 미로를 형성하게 됐다.
지하도시에는 밖에서 추수한 곡식들뿐만 아니라 사료들로 저장했고, 비상시 음료수를 위해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포도주를 놓아둔 흔적도 있다. 땅 속 깊이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또한 이것을 지하 공기를 맑게 해 주는 통풍장치로 원용하였다. 동굴 중간 중간에 외부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둥근 맷돌 모양의 큰 석물도 놓여있다.
2만 여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정도의 이 지하도시는 주거지로 사용하던 방들과 부엌, 교회, 곡물 저장소, 동물 사육장, 포도주저장실, 성찬 및 세례식을 갖던 장소, 신학교, 지하 매장지 등 도시 기능을 완전히 갖추었다.
이곳의 지하도시는 위기 시 타 지하도시로 피신할 수 있는 9km 정도의 지하 터널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지하 도시가 이 지역에 36개정도 있다. 이 지하도시에는 성화가 일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교 초기 때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 어흘라라라 계곡
갑바도기아에서 수도원 집성촌 괴뢰메 다음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닮은 험준한 골짜기에 동굴교회 열 두개가 있다.
이고니온과 데르베
* 셀주크 제국과 메블라나 신비주의의 "이고나온"
그리이스어로 이고니온, 터키어로는 코니아라고 한다.
사도행전(13, 51. 14, 1. 19. 21. 16, 2)과 디모후서(3, 11)에 언급되고 있으며, 바울로가 1차 전도 여행 때 전도한 도시로 알려있다.
비시디아의 아티오키아(지금의 얄바츠)에서 이고니온(지금의 코니아)까지는 180km이다. 기원전 334-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고니온을 점령했고, 기원전 323년 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막료 리시마쿠스 장군이 차지했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정권에 이어 베르가모 왕국이 차지했다가 기원전 133년 베르가모 왕 앗탈로스 3세가 임종에 이르러 왕국을 로마 공화국에 진상할 때 이고니온도 함께 넘어갔다.
사도 바울로는 제1차 전도여행 때(45-49년경)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어 여기서 유대인들과 아방인들에게 전도했다(사도 14,1-7). 제2, 3차 전도여행 때 사도 바울로가 다시 이고니온을 찾아봤다는 명시적 기록은 없으니 방문했으리라고 추정(사도 15,41-16,1; 18,23)한다.
11세기에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코니아를 수도로 삼아 셀주크 제국을 세웠다. 13세기에 이슬람 신비주의자 루미(Mevlana Celaleddin Rumi)가 여기서 메블라나 신비주의 종파를 창시했다. 그에 의하면 정신 없이 빙글빙글 춤을 추다 보면 비몽사몽간에 알라를 느낀다는 것이다. 코니아의 유적은 거의 다 셀주크 제국 및 메블라나 신비주의와 관련된 것들이다.
시내 한복판 셀주크 궁성 옛터(지금의 알라딘 파르키) 둘레도로 남쪽에 1910년에 지은 성 바울로 성당이 있다.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 두 명(이탈리아 출신)이 1985년에 부임하여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코니아 고고학 박물관 마당에 사도 바울로와 관련이 있는 비석 둘이 있다. 리스트라 비석(유물 796호)과 데르베인들이 로마 황제 아토니누스 피우스의 은덕을 기려 157년에 세운 송덕비(유물 1146호)이다.

* 데르베
사도행전(14, 6, 20. 16, 1)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사도 바울로의 전도지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데르베는 오랫동안 그 위치를 알 수 없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데르베라고 새겨진 비문 두 편이 발견됨으로써, 카라만 읍내에서 동북쪽으로 23km 떨어진 케르티 회육(Kerti Hoyuk)임이 확실시된다. 1957년 케르티 회육 근처 아쉬란(Asiran)마을에서 데르베인들이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년 재위)를 기려 157년에 세운 송덕비가 밸런스(Ballance)에게 발견되어 학계에 소개되었다. 이 송덕비는 지금 코니아 고고학 박물관 마당에 유물 1146호로 전시되고 있다.
송덕비 발견 이후 언제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또한 가지비문이 케르티 회육 인근 스드로바-수두라어(Sdrova Suduragi) 마을에서 밸러스에게 발견되었다.
그것은 4-6세기 비잔틴 시대의 비석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데르베 주교 미카엘(ho theophile-statos Michail episkopos Derbis), 여기 잠드시다”라고 적혀 있다.(M.Vehbi Uysal, Karaman Derbe Kerti Hoyuk, pp.21-22). 미카엘 주교 비석은 카라만 박물관 입구에 전시되고 있다. 위의 두 비석이 발견됨으로써 케르티 획육이 데르베였음이 확증되었다고 본다. 데르베는 관광객 홀로는 도저히 찾아 갈 수 없다. 카라만 시청이나 박물관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 관련 성서 구절-(사도14,1-7)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Antiochia in Pisidia)
베르케에서 함준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에이르디르(Egirdir) 호수 동북쪽에 위치한 주민 2만5천명 정도의 소도시 얄바츠(Yalvac) 북쪽 1Km 지점에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 in Pisidia) 유적이 있다. 지중해에서 가까운 베르게에서 160km 거리. 시리아에 셀레우코스 왕조를 창시한 셀레우코스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케이아로 명명했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곳에 로마군을 주둔시키고 로마인 거주지로 삼았다.
사도 바울로는 제1차 전도여행 때(45-49년경) 베르게에서 험준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에서 전도했다. 바울로는 안티오키아에서 두 안식일에 걸쳐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도했으나 배척 당하자 이방인들에게로 이동했다(사도 13, 13-52).
바울로가 제2차, 3차 전도여행 때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들렀다는 기록은 없으나 들렀으리라고 추정되며, 이 외에 역사적 사실은 별로 밝혀져 있지 않고, 유적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도심에는 비잔틴 시대에 지은 바울로 대성당 초석이 남아 있다. 큰 성당을 짓기 전에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작은 성당 바닥에서 이곳 주교 옵티모스(Optimos,357-384년경 재직)의 이름을 새긴 모자이크 두 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작은 성당은 본디 유대교 회당 자리였음이 판명되었다. 터키에서 유대교 회당터에 성당을 세원 사례는 여기뿐이다. 바로 이 회당에서 사도 바울로가 두 안식일에 걸쳐 유대인 동족에게 전도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관련 성서구절(사도13,13.52)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 파묵칼레(Pamukkale)
리커스(Lycus)강변 100m 언덕 위에 위치한 도시로서 라오디게아로부터 10km북방에, 골로사이로부터 16km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히에라폴리스는 지금의 터키어로 파묵칼레라고 하는데 그 뜻은 ‘목화성(Cotton Castle)’이라는 뜻이며 이곳의 온천물에 다량으로 포함된 칼슘의 축적으로 멀리서 보면 흡사 만발한 목화송이로 뒤덮인 성과 같이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도 이곳은 세계적인 자연의 비경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 온천물은 섭씨 35도로 특히 심장병, 소화기 장애, 신경통 등에 특수한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로마시대에는 로마의 황제들도 이 온천에 찾아왔었다.
* 교회사적 의미
히에라폴리스는 일찍부터 초대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성서에는 단 한번 언급되고 있다. 골로사이 4장 13절에 에바프로(Epaphras)와 필립보가 복음을 전한 곳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2세기경 버가모의 왕 엔메네스(Enmenes Ⅱ)에 의해서 도시로 세워졌다. 그러나 도시가 세워지기 전부터 이곳은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온천물이 솟는 동굴은 제의적인 장소로 여겨졌고, 따라서 일찍부터 이곳에는 성소(Sanctury)가 있었다.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라는 이름도 그 뜻은 본래 ‘성소가 있는 도시(City of the hieron)’였으며 후에는 거룩한 도시(Holy City)라는 뜻으로 변하였다. Cicero의 기록에 의하면 라오디게아-히에라폴리스-골로사이 지역에는 남자만 1만명 이상되는 많은 Dia spora Jew들이 살았다.

도시가 형성된 후부터 히에라폴리스는 리커스(Lycus)강 계곡의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곳은 직조업이 크게 발달하여 양털기술자, 카페트 직조자, 염색 기술자들이 많이 있었다. (오늘날도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카페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사도 바울로가 제3차 전도여행(53-58년 경)시 에페소에서 27개월 가까이 머물면서 전도할 무렵 그의 제자인 골로사이 출신 에바프라가 골로사이에 교회를 일으켰고(골로 1,6-7), 나아가서 근교 라디오게이아와 히에라폴리스에도 교회를 세웠다.(골로 4, 12-13) 파피아스(Papias, 60~130년경 생존)는 히에라폴리스의 주교로 재직하면서 '예수 어록 해설' 5권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다.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는 파피아스를 사도 요한의 제자로 높이 받들었다.([반이단론] 5. 33. 4) 그러나 지중해변 가이사리아 주교요,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는 파피아스가 천년왕국설을 주창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석두라고 혹평했다([교회사] 3. 39. 13).

히에라폴리스 뒷산에는 5~6세기경에 세운 사도 필립보(요한 12, 20-26 참조) 순교 기념관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사도 필립보는 여기서 전도하다가 도미시아누스 황제(81~91년 재위) 박해 떄 순교했다고 한다. 필립보 순교기념관에서 앞을 바라보면 전망이 탁 틔어 가까이는 목화성이, 저 멀리 왼쪽으로는 라오디게이아 폐허 언덕이 보인다.

이곳은 아직 체계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로마 시대의 공중목욕탕(Rome baths)의 유적이 남아있고 로마식 야외 극장터도 남아있다.
히에라폴리스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큰 공동묘지(necropolis)이다. 이곳에는 약 1,200개 이상의 석관이 발견되었으며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네크로폴리스 중의 하나이다.
에페소
에페소는 스르미나(오늘날 Izmir)로부터 74km 거리에 위치한 도시로서, 바울로 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카이스트로스(Kaystros)강을 타고 흙이 씻겨 내려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하고 바다와 에페소 사이에는 큰 거리가 생겼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입성으로 해방되었다. 알렉산더대왕이 죽은 후 희라브이 장군 Lysimachos는 에페소에 경기장, 체육관, 원형극장을 세워 에페소를 크게 발전시켰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에페소는 소아시아 서부지역의 수도가 되었고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정치적, 경제적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오늘날 발굴되는 에페소의 모습은 로마시대의 것이다.) 기원전 88년 시민들이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자, 로마의 실라(Sylla)장군은 에페소를 완전 초토화시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전 27~서기 14년 치세) 때부터 다시 재건된 이 도시는 아시아 속주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의 에페소는 오스트리아 고고학자들의 노고로 발굴된 것이다.
* 에페소 교회
초대 교회 사도 바울로가 제2차 전도 여행(사도 18,19-28) 시에 이곳에 잠시 머물렀고, 제3차 전도 여행 시에는 2년 3개월 간 머물면서 많은 기적을 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많은 책을 모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불사르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도 19,1-20) 바울로는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디모테오, 아굴라, 브리스킬라, 아볼로, 두기고(사도 18,18-26; 2디모 4,12) 등이 복음을 가르쳤다.

바울로는 로마 옥중에서도 이곳에 편지를 보냈으며, 로마에서 순교한 후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탁하신 말씀에 따라 마리아를 모시고 이곳에 와서 살면서 요한 복음과 요한 서간을 저술하였고, 그 후 이교도들에게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요한 묵시록을 저술하였다. 요한 묵시록 2-3장에는 당시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상을 기록하였고,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박해받을 때의 신앙인의 자세를 기록하였다.

한편 4세기경에 에페소는 소아시아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Council of Ephesus)에는 200여명의 주교들이 모여 성모 마리아의 신학적 위치에 관한 중대한 결정을 내려 Nestorian 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 에페소 종교회의에서 마리아는 "Mother of God"로 확인되었고 정통교리인 니케아신경이 재확인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구분하였던 네스토리아파는 파문을 당하였다.)

* 성 요한 성당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당신의 제자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맡기셨다(요한 19, 26-27). 요한은 성모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에서 에페소로 옮겨와서 지금의 에페소 시내 성모성당 터에서 살았고 죽어서는 에페소 서쪽 언덕 뒷산에 묻혔다고 하는데, 요한이 묻힌 곳에 4세기에 목조 성당이 건축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때(527~565년)는 돌과 붉은 벽돌로 거대한 대성당으로 증축했으나 8세기 때 이슬람의 침입으로 파괴되어 오늘날은 폐허 위에 수많은 유적의 흔적만 남아 있으며, 십자형 성당 한복판, 대리석 기둥 네 개가 서 있는 곳이 요한 사도의 무덤이라고 한다. 에페소, 베르가모, 필라델피아 등지에는 비잔틴 시대에 요한 성당이 세워진 반면 바울로 성당은 전혀 없다. 이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바울로보다 요한의 영향력이 컸다는 증거라 한다.


* 성모성당
노천 극장에서 아르키디안 도로를 따라 항구 쪽으로 100여 미터 내려가면 오른편에 5세기 초엽에 지은 성모성당이 있다. 그 터는 성모께서 요한 사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에페소로 옮겨와 살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 왔는데,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 성당은 교회 사상 성모께 봉헌한 맨 첫 번째 성당이다.


* 성모 마리아의 집
431년 에페소에서 열린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성모께서 예루살렘에서 이사와서 성모성당 터에 사셨다는 전설을 그대로 인정했는데 오늘날 에페소를 찾아가면 에페소 앞산 남서쪽 능선 아래 지점(속칭 피나야 카풀루)에 성모 마리아의 집이라는 곳을 찾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모께서 이곳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고 믿고 있다. 많은 무슬람 순례객들도 자기네 나름대로 성모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다. 여기 성모 마리아의 집이 발견된 경위는 매우 기이하다.
독일 태생의 가타리나 엠메릭크(Anna Katharina Emmerick 1774~1824년)라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소속 수녀가 전신마비 증세로 마지막 12년 동안 침대에 누워지내면서 자주 예수님과 성모님의 발현을 보곤 하였다. 독일 가톨릭 시인 브렌타노(Clemens Maria Brentano)는 수녀에게서 성모님 발현 이야기를 채록하여 1852년 "동정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수녀에게서 들은 대로 이 책에 성모님 집과 주변 환경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1878년 프랑스어 번역판이 출간되었는데, 이 책자를 구해 읽은 융(Yung)이란 신부와 그 일행이 1891년 에페소 주변 산야에서 책 내용과 맞는 집과 풍경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듬해 이즈미르 대교구 티모니(Timoni) 대주교가 이곳에서 미사를 드림으로써 순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6~7세기 비잔틴 시대 집 주춧돌만 남아 있었는데 이탈리아 키푸친 수도회에서 1950년 그 주춧돌 위에다 현재의 건물을 지었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그 집에서 정기적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을 허락하고, 이곳을 가톨릭 교회의 성소(Sacred Place)로 공포하였다.

* 아르테미스 신전과 바울로 사도
에페소에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였던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이 있었다.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로마인들은 Diana라고 불렀다)은 본래 달의 여신이었으며 호머(Homer)의 작품에는 사냥꾼 여신으로 등장한다. 아르테미스(Artemis)는 다산의 여신(fertility goddess)으로 숭배되었다.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은 에페소의 상징이었고 에페소 사람들은 스스로 "전각지기(Temple keeper)" 라고 불렀으며(사도 19, 35), 아시아에서 많은 순례객들이 모여들었다. 에페소의 은장이들은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만들어 순례객들에게 팔아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로의 활발한 전도로 그들의 수입이 줄어들자 은장이 대표 데미트리오는 은장이들과 시민들을 선동하여 바울로의 일행 가이오와 아리스타르코를 노천극장으로 끌고 가서 난동을 부렸다(사도 20, 17-38). 58년경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서 로마서를 집필한 다음 필립비 교회에서 과월절을 보내고(사도 20, 6) 돌아오는 길에 알레도스 항구에 들러, 거기서 북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을 불러 감동적인 작별인사를 했다(사도 20, 17-38)고 한다. 기원전 356년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여신신전은 한 정신병자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바로 이때 마케도니아의 수도 Pella에서는 알렉산더가 출생하였다. 왜 아르테미스 여신은 자신의 신전이 방화범에 의해서 불타는 것을 막지 못했는가? Pella로 가서 신전을 비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패배시키고(기원전 334년) 에페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불타버린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을 재건시켜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이때 에페소 시민들은 자력으로 신전을 복구하기를 원하였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제안을 외교적으로 거절하였다. "신(알렉산더 대왕을 지칭하는 말)이 다른 신의 신전을 건설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이유였다.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에페소 여자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귀금속을 다 바쳤다. 재건된 아르테미스 여신 신전은 아테네(Athens)에 있는 파르테논(Pharthenon) 신전보다 4배가 큰 규모였다(이것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 즉 길이는 약 130m, 넓이는 약 70m, 높이 20m, 또한 20m에 달하는 127개의 Lonictlr 석주(기둥)가 신전을 둘렀다.
이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7세기에 창건되고 기원전 6세기, 기원전 4세기에 재건되었다. 265년에 또다시 재건된 신전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지위를 굳힘으로써 인기를 잃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에페소에 성 요한 성당을 짓고 또 콘스탄티노플에 성 소피아 성당을 지을 때,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헐어 건축자재로 사용함으로써 신전은 깡그리 파괴되고 말았다. 지금은 비가 오면 늪지대로 변하는 저지대에 돌 기둥 하나가 남아있을 뿐이다. 에페소 박물관 아르테미스 전시실에 전시된 유물에서 그 옛날의 신전의 규모와 여신상을 볼 수 있다.

* 야외 원형 극장
헬레니즘 시대에 건축된 이 극장은 클라디우스(Cladius)황제(41~54) 때 공사가 시작되어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98~117) 때 완성되었다. 터키 전역에 산재한 노천극장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관중 약 25,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반원형 대형 야외극장이다. 청중을 위한 대리석 좌석은 3층 구조이며 각 층은 22계단으로 되어있다. 사도 바울로의 일행이 은장이들에게 봉변당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한다.(사도 19, 24-29) 1964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많은 부분이 복원되었다.
아고라(시민광장) :: 3세기 초반에 재건된 아고라는 야외극장으로부터 남서쪽에 위치한 개방식 장방형으로 각 변이 110m이며, 그 주위에는 돌기둥들로 이루어진 회의장들과 그 뒤에는 상점과 방들이 있고, 광장 가운데에는 해시계와 물시계가 있었다.

* 켈수스 도서관
아고라 남쪽 가까운 곳에 2세기경에 건축된 로마 제국 시대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다. 약 20만 권의 장서는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기원전 624-546)와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480)의 학문의 전통을 이어준 것이다. 복원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묵시록의 7대 교회
* 라우디케이아 (Laodicoa)교회
에페소의 동쪽 150km에 있으며 60년의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십자가와 기둥 등 무너진 벽체가 흩어져 있다. 히에라폴리스의 뜨거운 온천물이 9km가 떨어진 라우디게이아까지 흘러 오면서 물이 식어 미지근하게 된다. 이곳은 요한 묵시록(3,18)의 기록처럼 ‘후루기아(Phrygia)'라는 안약 원료의 생산으로 유명하다.
에페소에서 동쪽 내륙으로 17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인구 20여만명의 테니즐리가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8키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리오디게이아 페허인 나지막한 언덕이 있다.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 임금 안티오쿠스 2세 (기원전 261-252년 재위)가 이 지역의 전략적 요소 때문에 도시를 창건하고 왕비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이아라고 명명했다.
사도 바올로가 제3차 전도 여행 중(53-58년경) 에페소에서 27개월 가까이 머물 때 그의 제자 골로사이 출신 에바프라는 에페소에서 동쪽으로 180km 정도 떨어진 곳에 골로사이 교회(골로1,6-7)와 히에라폴리스 교회, 리오디게이아 교회도 세운 것 같다(골로 4,12-16).
요한 묵시록의 작가는 이 교회를 호되게 꾸짖었다(묵시 3,14-22).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중략) 너는 이렇게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이곳의 교우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적으로는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1710년과 1899년에 지진으로 파괴된 이곳을 1961-1963년 케나다 라발대학교 고고학팀의 발굴작업으로 로마식 야외 운동장(Stadium)과 두 개의 큰 야외 원형극장 터가 발견되었다. 아직도 유적 대부분이 땅속에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 필라델피아 (Philadelphia)교회
요한 묵시록은 일곱 교회 가운데서 오직 스미르나 교회와 더불어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나무라시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오히려 칭찬했다.
관련성서구절 : 요한 묵시록 3장 7-13절
필라델피아는 기원전 159-138년 버가모(Pergamum)의 왕 Attalus 2세, Philadelphus에 의해 도시가 세워졌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Philadelphia라고 불리워 지게 되었다.
이곳은 사르디스(Sardis)와 베르가모(Pergamum) 그리고 라오디게아(Laodicoa)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산업이었다.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이 도시가 대파되었는데 디베리우스(Tiberius) 로마 황제의 도움으로 재건되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이에 감사하며 로마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웠다. 그 크기는 약 100m×50m 이고. 신전 둘레는 56개의 석주가 들어있다. 이 신전은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로마황제 숭배의 도시에 초대교회가 세워졌고, 1391년 베야짓 1세의 군대와 마뉴엘 2세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에 함락될 때까지 이 도시는 소아시아 그리스도교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1천 여명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1391년부터 알라쉐히르(Alasehir)로 불리고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교회가 있었는지는 명확치 않으나, 일찍부터 순교자가 나온 지역이다. 폴리카르푸스가 순교할 때 필라델피아의 신자 10명도 함께 순교하였고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이곳 신자들은 불안했으며 이 불안은 이들의 신앙을 뜨겁게 했다. 110년경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던 도중 필라델피아 교회에서 환대를 받은 다음 스미르나를 거쳐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 항구에 이르러서 필라델피아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가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유적으로는 베쉬 에일륄 지구 장터에 비잔틴 시대에 지은 사도 요한 성당의 유적이 남아 있다.

* 사르디스(Sardis)교회
아키사르(티아디라)에서 남쪽으로 70km 지점에 리디아 왕국(기원전 680-546년경)의 수도였던 사르디스 페허가 있다. 사르디스는 기원전 600-546년까지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였다. 성읍은 해발 450m인 트몰루스 산의 돌출부 고지 위와 고지 아래 계곡 두 곳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6세기에 아주 부강한 도시였고, 난공 불락의 도시였다. 그래서 누구도 침공할 수 없다는 방심에 혀를 찔려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 고레스왕과 218년 아티오쿠스 3세의 침략을 받고 함락됐다.

오늘날 사르디스는 4세기에 세워진 교회와 중세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두 개의 교회가 남아 있다. 4세기의 교회는 웅장한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의 남동쪽 모퉁이에 작은 건물로 세워졌고, 중세 비잔틴 교회 유적은 유대인의 회당 건너편에 세워졌는데 둥근 지붕으로 외부는 벽돌로 쌓았고, 내부는 모자이크 무늬와 수채화로 그린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사도 요한 당시 사르디스 지역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의 주화인 금화가 만들어진 곳이다. 사르디스 교회는 박해도 없었고, 이단의 방해도 없었으며, 유대인의 비방과 중상도 받지 않았다. 신앙적 자극이 없었던 사르디스 신자들은 물질문화에 빠져 나태하고 신앙이 자라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은 교회였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깨어 있어라. 회개하여라.”고 질책했다.
관련성서구절 : 요한 묵시록 3장 1-6절
사르디스 주교로 가장 알려진 이는 부활론을 집필한 멜리토(190년경 사망)이다. 그는 유대 월력에 따라 나산달 15일(춘분 다음 보름날)에 부활 축일을 지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요일에 예수 부활 축일을 지낸 서방교회와 오랫동안 전례상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멜리토는 예수께서 "본성으로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시다(Physei thcos on anthropos)“라는 정통 그리스도론을 주장했다. 멜리토 성인의 축일은 4월1일 이다.

* 체육관과 회당, 아르테미스 신전
티아디라에서 62km 지점에 있는 살리흘리(Salihli) 읍내를 거쳐 사르디스에 도착하면 국도 오른편에 웅장한 체육관이 보인다.
기원후 17년에 생긴 대지진으로 헬라 문화의 도시가 파괴되자 인위적으로 높은 지대에 대리석으로 193-235년에 세워졌다. 당시 신체 단련과 교육장을 사용된 이 체육관은 중앙에는 장방형의 방들과 동편의 씨름장, 서편의 대형 목욕탕이 있었다. 다 무너진 체육관을 하버드대학과 코넬대학 고고학 팀이 발굴 복원했다.
체육관 옆에 있는 4세기 말엽의 유대교 회당은 유대인들의 경제적인 도움으로 역시 같은 팀들이 복원했다. 이 유대 회당은 200년부터 616년까지 교회로 사용되기도 했다.
트몰루스(해발 2,137미터) 산아래 자리잡은 아르데미스 신전이 장관이다. 에페소의 아르메데스 신전이 더 크다고 하지만 초석은 늪 속에 묻혀 있고, 형체는 거의 살아져버린 데 비해 이곳은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600년경에 처음 세워졌으나 기원전 499년 이오니아 혁명당시 파괴되었다. 그후 334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전면 폭 50m, 길이 90m, 돌기둥 78개의 웅장한 규모로 재건되었으나 끝내 완공되지 못했다. 알렉산더 대왕 때 건축된 신전을 비잔틴 시대에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사르디스의 수호신은 시벨리(Cybele)로 사람들은 시벨리신에게는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는데 사도 요한은 이를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신실한 몇 사람을 칭찬했다고 한다.

* 스미르나(Smyma)교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 묵시록의 이 말씀은 스미르나 초대교회에 주신 말씀이다. 초대교회 당시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은 하늘이 열리면서 들려온 계시의 말씀을 듣고 소아시아 지역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기술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스미르나에 있던 교회였다.

* 스미르나 역사
스미르나는 오늘날 인구가 200만명이 넘는 이즈미르(Izmir)로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터키 세 번째 도시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도시 이름도 스미르나에서 이즈미르로 바뀌었다.
스미르나는 기원전 3000년쯤부터 발전한 에게 해안의 항구 도시로 그리스 최대 서사시를 남긴 호머(Homer)의 고향이라고 전해진다. 기원전 330년대 소아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스미르나에 주둔한 일이 있었다. 근처 파거스 산에서 사냥을 다녀와 낮잠을 자던 알렉산더는 네메시스 여신으로부터 스미르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라는 이상한 꿈을 꾸었고, 이를 실행에 옮겨 파거스 산에는 거대한 성채를, 산 밑 해안에는 항구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 성채는 지금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스미르나는 기원전 27년 로마와 합병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그러나 170년대 이 지역을 휩쓴 큰 지진으로 스미르나는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 이 때 스미르나의 웅변가 아리스테데스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도시 재건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철학자로서도 유명한 황제는 명문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복구된 스미르나는 여러 차례 일어난 지진으로 스미르나의 영광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땅 속에 묻히고 말았다.


* 순교자 성 폴리카르푸스 주교
스미르나에는 일찍부터 그리스도교 복음이 전파되었고 초대교회가 세워졌다.
스미르나 교회는 사도 요한의 수제자인 순교자 폴리카르푸스(Polycarp) 주교가 시무(施務)한 곳으로 폴리카르푸스 교회라고도 한다.
폴리카르푸스는 예수의 직제자들과 교부들 사이에 연결고리 역할을 한 중요한 교부이다(이레니우스 ‘반이단론’ 3,3.4). 그는 마르치온계 밀 발렌티누스계 영지주의자들과 설전을 벌이곤 했다.
폴리카르푸스 주교는 160년 교회가 환난을 당할 때 체포되어 로마 총독이 “내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였을 때 "지난 86년 동안 나는 예수님을 섬겼소. 그 분은 한번도 나를 버린 일이 없었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분을 모른다고 말하여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욕되게 할 수 있겠소.“라고 유명한 대답하여 화형에 처해졌는데, 화염 속에서도 주님을 찬미하며 순교하였다.
관련성서구절 : 요한 묵시록 2장 8-11절
묵시록의 저자는 스미르나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박해를 당하리라고 예고하면서, 그럴 때일수록 신앙에 충실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훈계를 했다(묵시 2,8-11).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푸스(Polycarp 69-155년 생존)의 순교록에 보면 2세기에 실지로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박해가 있었다. 이즈미르에는 폴리카르푸스 주교 순교 기념 대주교좌 성당이 있다.

* 티아디라 교회
티아다라는 소아시아 서쪽 루카스 강변에 있던 성으로 동남쪽의 사르디스와 서쪽의 베르가모를 잇는 길 사이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680년경의 리디아 인들이 티아디라와 사르디스 일대에 리디아 왕국을 건설했다. ‘펠로피아(Pelopia)'라고 명명됐던 티아디라는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더의 장군인 셀레코우스(Seleukos)가 이곳을 점령하고 군대를 주둔시킨 뒤, 이곳에서 출생한 자신의 딸의 이름을 따서 ’티아디라(티아의 동네)‘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도시를 정착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을 이주시킴으로써 상업도시로 번성한 티아디라는 리디아 왕국 때부터 베르가모, 비잔틴, 사르디스, 스미르나의 교차지이며, 상업도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로부터 꼭두서니 뿌리에서 추출한 물감으로 만든 고가의 비단과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했던 티아디라에는 여러 종류의 상인조합(Guild)들이 잘 조직되어 있었는데, 사도 바울로가 2차 전도 여행 중 마케도니아의 필립비(Philippi) 도시 외곽에서 만난 옷감장수 ’리디아(Lydia)'도 이곳 리디아 출신의 상인이었다.(사도 16, 11-15)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입교 시킨 리디아가 이곳 출신이고, 특히 옛 조상의 왕국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사실과, 물욕 때문에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교우들로부터의 어떤 물질적 도움을 거부하던 바울로 일행이 리디아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과 묵시록의 7교회에 보낸 편지 중 티아디라에 보낸 편지가 가장 길다는 것은 많은 것을 묵상케 한다. (묵시 2, 18-29)

* 베르가모 교회
요한 묵시록 2장 12-17절에 나오는 이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랜 선사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막료 리시마쿠스(Lysimachus) 장군이 베르가모 일대를 통치하다가 기원전 281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왕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러시마쿠스의 부하 필레타리우스가 베르가모를 수도로 삼아 베르가모 왕국을 세웠다. 베르가모는 독립된 왕국의 중심이 되어 높은 문화를 이루었다. 기원전 133년 마지막 왕 앗달로스 3세가 죽으면서 왕국을 로마 공화국에 헌납하게 되고, 베르가모는 아시아 속주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후 서기 4세기경까지 이 지방의 문화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로마 제국 시대에는 아시아의 수도로서 최대로 번영했다.

* 아크로 폴리스 (Acropolis)
베르가모에 가면 시가지 동북쪽 높은 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천년요새(Acropolis)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는 베르가모 왕궁, 석빙고와 같은 음식 창고, 멀리서 식수를 끌어들여 저장한 저수장, 지금도 복원작업중인 하드리아누스 신전, Enmenes 2세 (197 - 159 B.C.)가 지은 당시 세계에서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컸다는 유메네스 도서관, 가파른 언덕배기에 만들어진 노천극장,소나무 숲이 무성한 제우스 신전 등이 있다.


* 세라피스 (Serapis) - 요한 성당
로마 황제 도미시아누스(81-96년 재위)의 신전과 함께 묵시록 2장 13절에서 말하는 '사탄의 권좌'로 추정되는 제우스 신전이 있다. 옛 성채 한 모퉁이에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건축물은, 밑으로 Selinus 강이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이 건물은 본래 이집트의 세라피스 신전으로 사용되던 것을 비잔틴 제국 당시 내벽을 쌓아 성당으로 개조하여 사도 요한 성당이 된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비잔틴 시대에 사도 요한이 거둔 성과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이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관련 성서구절 : 요한 묵시록 2장 12-17절
로마황제 Caracalla (A.D. 211 217)도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황제는 거의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 원형극장을 세워주었다. 이곳의 치료방법은 약물요법 이외에 정신요법, 일광욕, 운동요법, 맨발 걷기 요법, 음악요법 등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곳의 주요 경제 활동과 생산물은 농업과 은광, 가축, 양털직조 그리고 글씨를 쓰는 양피지(Parchment)였다.
골로사이
에페소에서 동쪽 내륙으로 176km 떨어진 데니즐리에서 다시 동쪽으로 약 30km되는 지점에 골로사이 유적이 있는 작은 언덕이 있다. 언덕 남쪽으로 3km쯤 떨어진 카드무스산(Cadmus, 터키어로는 호나즈다어, 해발2571m) 기슭에 아담한 호나즈(Honay)마을이 있다.
사도 바울로가 제3차 전도 여행 중(53-58년경) 에페소에서 27개월 가까이 머물면서 전도할 무렵 그의 제자 골로사이 출신 에바프라가 골로사이에 교회를 창립했고 이어 그 인근 히에라폴리스와 라오디게이아에도 교회를 세운 것 같다(골로 4, 12-13).
골로사이서는 바올로 사도가 이단에 물들 염려가 있었던 골로사이의 교회에 보내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도록 촉구한 서간으로 혼합주의를 경고하는 교리편(1, 12-2, 23)과 그리스도교 윤리를 강조하는 훈계편(3,1-4, 6)으로 구성돼 있다. 이 서간이 정말 바울로가 쓴 친서인지, 아니면 후대의 다른 사람이 바울로의 이름을 빌려 쓴 가탁 인지는 아직도 학설이 분분하다.
바울로가 에페소 로마군 감옥에서 골로사이 교회 필레몬에게 써 보낸 필레몬서는 친서로 알려져 있다. 골로사이 교회 신도 필레몬의 종 오네시모가 에페소에서 전도하다가 로마군 감옥에 갇힌 바울로에게 도망쳐 왔는데, 바울로가 오네시모에게 세례를 준 다음 그를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당부하는 말을 적어 보낸 것이 필레몬서이다. 즉 오네시모를 책망하지 말고 가능하다면 자신에게로 다시 보내달라는 내용으로 필레몬서는 바울로의 친서들 가운데서 개인에게 보낸 단 한편의 사신이다. 이 사신은 필레몬이 바울로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 내용과 표현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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