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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성지안내



국가명 포르투갈공화국 (The Portugese Republic)
수도 리스본(Lisbon) - 수도권일대 인구 344만명
면적 92,141.5㎦(한반도의 약 2/5)
인구 1,035만명(2001) - 해외이주자 : 약 500만명
주요민족 이베리아족, 켈트족, 라틴족, 게르만족, 무어족 등의 혼혈
주요언어 포르투갈어
종교 가톨릭(90% 이상)
화폐 유로(EURO)
기후
(카이로 중심)
온도/월별
1월
2월
3월
4월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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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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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월
11월
12월
최저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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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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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양성, 지중해성 및 대륙성 기후의 혼합형
한국과 동일한 위도 상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겨울이 짧고 온화하며, 봄이 길고 여름이 건조하고 약간 더운 편인 쾌청한 날씨를 보인다. 봄과 가을에는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며, 비가 오지 않는 뜨겁고 건조한 여름에는 모두들 바다로 향한다. 1월의 평균기온은 12도이고, 8월은 24도이다. 비는 대부분 겨울, 봄, 그리고 가을에 내린다. 우기인 겨울철에도 비가 오지 않아 해마다 가뭄이 드는 남부와는 달리, 북부에는 많은 비가 내리고 궂은 날씨가 계속된다.
포르투갈에서는 눈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내륙의 쎄라 다 이스트렐라(Serra da Estrela)에는 가끔 눈이 내리기도 한다.
좁은 국토인데도 포르투갈 본토는 지리적 다양함을 갖는다. 떼쥬 강은 국토를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하는데, 이 경계선을 축으로 하여 기후, 풍경, 거주 양식이 다르게 나타난다.
포르투갈의 특징중 하나는 경치가 매우 다양한 것으로, 대서양의 섬들인 마데이라섬(796km²)과 아쏘레스군도(2335km²)를 제외한 면적이 89,000 평방 킬로미터인 나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사실이다.
주요산업 -
전압 -
시차 -
1. 역사
포르투갈인의 기원은 선사시대와 석기시대의 고인돌이 대서양 연안을 따라 산재된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철기시대의 유적이 알가르브(Algarve)지역에서 발견된다. 이베리아 반도의 서부 지역을 일컫는 루지타니아(Lusitania) 지역이 포르투갈의 근간이 되었고, 이베리아 반도 최초 거주인은 이베로인이며,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 그리스인이 반도에 나타났다. 그리스인은 반도의 남동부인들에게 헬레니즘 문화를 소개하고 켈트족의 침입이후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5년까지 약 150년 동안 로마인들은 루지타니아 지역을 지배하며, 라틴어를 전파하여 포르투갈어의 기원이 되었고, 이후 기독교도 문화도 남기게 되었다.
2세기에서 5세기까지의 로마 점령기에는 여러 건축물이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는 잔해만이 발견되고 있다. 5세기의 비시고트족이 북쪽에서, 8세기에 무어인이 지브랄타 해협을 건너와 지배를 시작하면서 그들의 문화, 건축, 농경법이 이곳에 소개되었다. 409년부터는 게르만족이, 711년 북아프리카의 지브롤터 해협을 통하여 무어인이라 불리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하여 5세기에 걸친 아랍 문화의 영향을 남겼다.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7세기로 거슬러올라가 도루 강의 북쪽에 위치한 포르투칼렌스(Portucalense) 백작령에서 나왔다.
1143년 아퐁수 1세(D. Afonso I)가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고, 1179년 교황이 포르투갈을 왕국으로 인정하였다. 1249년 아퐁수 3세(D. Afonso III)는 십자군의 도움을 받아 알가르브 지역에서 무어인을 물리치고 오늘날의 포르투갈과 비슷한 영토를 만들었다.

항해 왕 엔리케는 15세기 초에 포르투갈의 남쪽인 지브롤터 해협에 위치한, 마데이라와 아소레스 군도, 앙골라, 모잠비크 등을 발견하고 1488년 인도의 희망 봉에 도착,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na)의 인도 항로 발견으로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 확장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로 포르투갈의 가장 위대한 왕 중 하나라고 불리는 주앙 1세(D. Joao I)는 아비스 왕조의 시초가 되어 스페인으로부터 포르투갈을 보호한다. 1495년 ~ 1580년 포르투갈의 국력은 절정기에 달한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명한 모험가들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페르낭 드 마갈랑이스(Fernao de Magalhaes),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 등은 새로운 무역루트를 개척하여 인도, 말레이시아, 페르시아만, 중국, 브라질, 아프리카에 걸쳐 대제국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미치게 된다.
그러나 16세기 말경부터는 쇠퇴하여 국제사회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던 이웃나라 스페인에게 합병 당하기에 이른다. 포르투갈은 얼마 되지 않아 주권을 되찾지만, 쇠퇴를 향해 가는 국운과 시대의 흐름을 뒤집지는 못했다.

혁명의 시대인 19세기, 경제는 파산하고, 내란으로 정치는 수렁에 빠지면서, 1908년 카를로스 1세(D. Carlos I)와 그의 아들이 암살되고, 둘째 아들 마누엘 2세(D. Manuel II)가 영국으로 망명하자, 1910년 전제 군주제는 철폐되고 공화국 시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 시대도 잠깐, 20여년 간의 불안과 혼란의 시대가 지나, 1926년 군부쿠데타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onio de Oliveira Salazar)가 1932년 권력을 잡은 후, 1968년까지 우익 독재가 이어졌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억압정치와 무의미하고 소모적이었던 아프리카 식민지전쟁은 국민들의 불만을 가중시키게 된다.

1968년 살라자르는 권력을 후계자인 마르셀루 카에타누(Marcelo Caetano)에게 넘겨주었으나 결국 1974년 4월 25일 군부의 젊은 장교들이 주도한 ‘카네이션 혁명’이라 불리는 쿠데타로 새롭게 얻은 정치적 자유는 초반 공산당에 의해 주도되었고, 1970년대와 80년대의 포르투갈은 정치적으로는 극좌와 극우의 대립, 경제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1983년 대통령에 당선된 마라우 소아레스(Mario Soares)는 유럽공동체(EC)의 포르투갈 가입을 추진하여 1986년 EC 가입과 1992년의 유럽통화기구(EMS) 정회원 자격을 획득함으로써 안정과 번영으로의 도약을 구축했다.
2. 주요 순례지
파티마
리스본 북쪽 141km지점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이 작은 도시가 유명해지고 관광객이 몰려 들게 된 것은, 1917년 5월 13일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기적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이 곳 양치기 어린이들에 의해 확인된 뒤 이 곳을 찾는 포르투갈 국내외 순례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으며, 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던 자리에 1928년 대성당이 세워졌다.

파티마에는 성모 마리아 발현의 기적을 기념하여 세운 성모 마리아 발현 성당과 바실리카 (Bacsilica)가 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 때인 1917년 5월 13일, 지금의 성모 마리아 발현 성당이 있는 언덕에서 양을 돌보던 세 어린이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앞으로 5개월 동안 매월 13일 이 곳에 나타나 평화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다. 이 일은 그 해 10월 13일까지 5개월 동안 수많은 사람에 의해 확인되었으며, 1930년 10월 13일 레이리아 주교가 공인을 하였다. 이어 로마 교황이 확인하여, 1953년 이곳에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이후 파티마는 프랑스의 루르드와 함께 주요 성모발현 성지로 꼽히며, 해마다 수십만 명의 순례객이 순례하고 있다.
* 성모님 발현과정
파티마는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월 13일에 여섯 번을 계속하여 성모님께서 가난한 세 목동(루치아, 히야친따, 프란치스꼬)들에게 발현하셨던 마을이다.

폴리스(도시국가)의 중심이었던 언덕으로 폴리스의 수호신을 제사 지내는 신성한 지역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에는 많은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이 나타났으며, 아크로폴리스 중심에 있는 파르테논은 그리스식의 거대한 궁전으로 기원전 438년에 아테네여신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세워졌다.
아테네 한복판에 솟아 있는 언덕으로 아테네의 상징적인 유적지이자 서양 세계의 가장 중요한 고대 기념물이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하여 에렉티온 신전, 니키 신전 등 수많은 신전들이 2,500여 년의 찬란했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제사 지내던 성역으로, 지도층 인사들조차 출입이 제한되었던 곳이다.
아크로폴리스(‘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라는 뜻)에 최초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이다. 최초의 신전들이 미케네 문명 시대에 여신 아테나에 대한 숭배로 지어지기 시작했고, 기원전 6세기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아크로폴리스 위에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10년에 델피 신탁(Delphic Oracle)으로 신의 영역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아크로폴리스의 모든 건물들이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의 전야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페리클레스가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하고자 노력하여 아크로폴리스를 신전의 도시로 변형시켰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 복구는 절정에 다다랐다. 이후 아크로폴리스는 다시 수세기에 걸쳐 재난을 겪어야 했다. 오토만 등 외국의 점령 기간 동안의 파괴, 영국 등 외국 고고학자들의 절도, 독립에 따른 부적절한 보수, 방문객들의 훼손, 지진 등. 1687년의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터키 공격은 최악이었다. 이때 아크로폴리스가 폭파되어 전 건물이 소실되었다. 터키로부터 그리스의 독립 이후 아크로폴리스 복원작업이 신생 그리스정부의 첫 번째 과제로 시작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① 1917년 5월 13일 세 목동들이 코바 다 이리아에서 묵주기도를 바칠 때 눈부신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세 목동에게 10월까지 6차례에 걸쳐 매월 13일 같은 시각에 이곳에 나와 주기를 청하셨다.

② 6월 13일에는 매일 묵주기도를 바칠 것과 글읽기를 배우도록 권하셨고 루치아가 한 병자를 낫도록 해 달라고 청하자 그 여인은 회개하면 금년 내로 낫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프란치스꼬와 히야친타는 곧 하늘나라로 데려갈 것이며 루치아는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알아 사랑하도록 가르치는데 있어 너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좀 더 머물러 있어야 해."하고 말씀하셨다.

③ 7월 13일에는 전쟁이 끝나도록, 또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매일 묵주기도를 바칠 것과 그리고 희생 때마다 "오 예수여, 이 희생은 당신께 대한 사랑과 죄인들의 회개와 마리아의 티 없으신 성심을 거슬린 죄를 기워 갚기 위한 것이나이다."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또 "내가 청하는 바를 사람들이 이행하면 러시아는 회개하고 세계에는 평화가 올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는 그 그릇된 사상을 전 세계에 전파하여 착한 사람들이 순교하고 교황은 많은 고통을 당할 것이며…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나의 티 없는 성심이 승리를 거두어 교황은 회개한 러시아를 나에게 봉헌하게 될 것이고 세계는 한동안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하시고 또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그리고 너희는 묵주기도 매 단이 끝날 때마다 '예수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연옥 영혼들을 돌보시되 그 중에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라고 기도하여라"고 하셨다.

④ 8월 11일 읍 당국은 세 목동과 양친을 소환하였고 8월 13일에는 2만 명 인파가 파티마에 몰렸는데 파티마 경찰서장은 본당신부 입회 하에 이 어린이들을 심문한 후 감옥으로 데려갔다. 이틀 동안 심문 받으면서도 일체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고 끓는 물에 집어넣겠다는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성모님은 10월 마지막 발현 때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기적을 행하겠다고 약속하셨다.

⑤ 9월 13일 약 3만 명의 군중이 코바 다 이리아로 몰려 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부탁드려 달라고 하며 또 가까이 올 수 없는 사람들은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하였다. 루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고 청하자 홀연 구름 한 점 없는 태양이 그 빛을 잃더니 별이 총총히 나타나며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다. 전쟁이 끝나도록 계속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당부하신 후 8월 발현 시 약속하신 바를 재차 약속하시면서 다음달 13일에도 꼭 나오라고 하셨다. 루치아가 "백성들이 성당을 하나 지어 바치고 싶어합니다."고 알려드리자 성모님은 좋다고 하시며 여기 헌금한 돈의 반은 먼저 성당을 짓는데 쓰라고 하셨다.

⑥ 10월 13일 포르투갈 전국에서 약 7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루치아는 군중들에게 우산을 접고 묵주기도를 바치기를 청하였다. 이때 번개가 번쩍이며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다. 성모님은 나는 매괴의 여왕이며, 내가 바라는 것은 매괴의 여왕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성당을 하나 지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부탁하시고 전쟁이 끝나 군인들은 곧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이어서 성모님은 "사람들은 그 생활을 고치고 그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한다."라고 하시고 슬픈 표정을 지으시며 간청하는 목소리로 "이제 인간들은 이미 너무도 상심해 계시는 주의 마음을 더 이상 상해 드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성모님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바로 이 말씀이 파티마 메시지의 핵심을 이루는 말씀이다. [ 에렉티온 신전 ]
파르테논 신전 북쪽에 세워진 이오니아 양식의 작은 신전. 파르테논 신전이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념물이긴 하나 그것은 신전이라기보다는 전시기념물에 가깝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신전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이 에렉티온 신전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곳에 세워졌으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의 삼지창을 내던져 꽂힌 곳으로, 지혜의 신 아테나가 올리브나무를 심은 곳이다. 따라서 이 신전에는 이들 신들의 전설을 본뜬 조각상들이 있다.
이 신전은 아테네의 신화상의 왕인 에릭토니우스(Erichthonius)의 이름을 따 붙인 신전이다. 따라서 아테나, 포세이돈, 에릭토니우스를 제사 지내왔다. 2개의 신실(神室)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아테나 신실, 또하나는 포세이돈 신실이다. 이 신전은 아름다운 여인상기둥(女像柱)들로 유명하다.
원래 이 신전은 페리클레스가 아크로폴리스를 위하여 설립 계획을 세웠으나 펠레폰네소스 전쟁으로 그의 생전에 이룩되지 못하고, 그가 죽은 지 8년 후인 기원전 421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406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아리오스 파고스 (Arios Pagos) ]
아크로폴리스 왼편 아래쪽(북서쪽)에 위치한,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널찍한 바위다. 바울로는 2차 전도여행 때 우상으로 가득찬 아테네에서 회당에서 유다인들과 또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방인 유다 교도들과 토른을 벌였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들에 의해 아레오 파고 법정으로 간 사도 바울로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설교한 유명한 장소이다.(사도 17, 16-34)]
[ 아고라 (Agora) ]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고대 그리스 유적지. 아고라란 광장이나 시장을 뜻하는 말이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건물과 신전이 들어서고, 광장 주변에는 노점상이 모여 시장이 서기도 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 철학, 문화, 인생을 논하거나 상업정보를 교환하던 광장이다. 1931년부터 대대적인 발굴작업이 벌어져, 아타로스의 스토아가 복원되어 박물관이 되어 있고, 여기서 발굴된 것이 진열되고 있다.
[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
104개가 있던 돌기둥 가운데 15개만 남아 있는 고린토 양식의 건축으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그리스 최대의 신전이다. 근처에 아드리아누스문이 있다.
올림포스 산의 제우스에게 봉헌된 신전 유적지. 전설에 따르면 이 곳에 신전이 세워진 것은 신화상의 듀켈리온(Deucalion)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역사시대에 제우스 숭배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515년 아테네의 참주(僭主)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착공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AD 124~125년경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신전 안에는 황금과 상아로 만든 제우스 상이 있다. 아크로폴리스보다 웅장했다는 건물은 4세기에 고트족이 파괴했고 지금은 열 다섯 개의 코린트식 기둥만 남아 있다.
[ 니케 신전 ]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모시는 신전이다. 기원전 420년경에 건축가 칼리크라테스(Kallikrates)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오니아 양식으로 열주가 아름다운 신전이다. 이 신전 역시 1686년 터키에 의해 분해되어 입구에 거대한 대포가 놓여져 있었다. 1836년~1842년 사이에 복원되었다. 1936년에 플랫폼이 다시 붕괴되어 재복원하였다.
[ 디오니소스 극장 ]
아크로폴리스 남동쪽 비탈에 있는 반원형의 극장. 이 극장은 처음에는 기원전 6세기 무렵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디오니소스 페스티발이 개최된 이래 목조로 세워졌었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5세기 황금시대 동안에 매해 페스티발이 이곳에서 열렸고, 정치인들이 공연의 스폰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극장은 기원전342~326년 사이에 리쿠르구스(Lycurgus)에 의해 다시 돌과 대리석으로 재건축 되었다. 이후 로마시대에도 극장은 공연은 물론 국가경사나 의식에 사용되었다. 관객석 맨 앞줄에는 귀족석까지 마련되어 있다. 무대 뒤쪽 한 층 높은 곳은 배우들이 연기하던 곳인데, 그 밑에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일생을 묘사한 뛰어난 조각이 남아 있다.
[ 아드리아누스의 문 (Adrianos's Gate) ]
2세기 초 황제 아드리아누스에 의해 지어졌다. 뒤에 고대 그리스의 가장 큰 신전인 올림피온 제우스 신전의 폐허가 있다.
제우스신전 바로 앞에 있는 신구(新舊) 아테테의 경계선도 겸하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문이다. 신구란 고대 아테네와 로마시대 아테네를 구분하는 개념이다. 개선문 형식의 이 문은 AD 131년에 아테네인들이 아테네문명을 칭송하고 본받고자 노력한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를 칭송하기 위하여 건설하였다. 이 문 양면에 두개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아크로폴리스를 향한 한 면에는 "이것은 테세우스(Theseus)의 고대 도시인 아테네이다."라고, 다른 면에는 신도시를 향하여 "이것은 테세우스의 도시가 아닌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인 아테네이다."라고 씌어 있다.
[ 올림픽경기장 ]
신타그마 광장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원래는 일리소스(Ilissos)강을 끼고 아그라(Agra)계곡과 아르데토스(Ardettos)계곡 사이에 자연스런 홈이 나 있어 이것을 스타디움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기원전 330~329년에 리코우르고스(Lykourgos)에 의해 '위대한 판 아테나 축제(Great Panathinaea Festivities)'의 운동 경기를 위한 스타디움으로 변형되었다. 그후 AD140~144년 사이에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에 의해 스타디움이 복원되었는데, 이것이 1870년에 발굴된 현재의 모습이다. 즉 길이 204.07m, 넓이 33.35m의 말발굽모양 구조이다. 약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로마시대에는 스타디움이 투기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근대에 와서는 19세기 말엽에 알렉산더 대부호 애버로프(G.Averof)에 의해 스타디움이 복원되었는데, 1896년에 부활된 최초의 올림픽게임이 여기에서 개최되었다.
[ 신타그마 광장 ]
아테네의 중심 광장. 전국으로 뻗은 도로의 기점이다. 일대가 그리스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 만하며, 관청과 비즈니스빌딩, 쇼핑가들이 몰려 있다. 항공사, 여행사도 많이 모여 있고, 엘리니콘 공항을 오가는 공항버스도 이곳에서 발착한다. 광장에는 카페니온(옥외 찻집)이 늘어서 있어 쉬기에 알맞다.
신타그마 광장이란 '헌법 광장'이라는 뜻인데, 1843년 이곳에서 최초의 헌법이 공포된 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또 이곳은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리케이온 학원을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성모님은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키셨는데 갑자기 비가 멎더니 구름이 걷히며 해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해는 달처럼 은은한 빛을 띠고 있었으며 모여있던 군중은 모두가 창공에서 태양이 떨어져 내려 저들을 향해 돌진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자 모두가 진창 위에 무릎을 꿇고 통회의 기도를 바쳤다. 목동들은 태양 옆에 성 가정이 발현하여 성호를 그으며 세계를 축복하는 광경을 목격하였고 루치아는 백성들을 축복하시는 구세주를 목격하였으며 목동들은 고통의 성모님도 목격하였다.

파티마의 성모님 발현은 1917년의 일이었으나 1942년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러시아가 혁명과정에 있었고 힘은 미미하였으니 장차 이러한 러시아가 세계평화를 위협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결국 파티마의 메시지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소련은 한동안 공산주의 사상과 정치적 압제를 통해 세계의 절반을 지배했다가 이제 다시 소련제국의 붕괴로 "티 없는 성심이 승리를 거두어… 회개한 러시아"를 성모님께 봉헌하게 된 것이 아닌가! 이것은 소련의 회개를 위하여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바친 그 묵주기도의 위력을 여실히 증명해 보인 것이다.
루치아 수녀 루치아는 1907년 3월 22일 알류스텔에서 출생하여 3월 30일 루치아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1남 6녀 가운데 막내로서 6살에 첫 영성체를 하였고 가정 형편상 양치는 일을 했으며 1917년부터 친척인 히야친따와 프란치스꼬와 함께 어울려 다니다가 그 해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는데 그때마다 루치아 만이 성모님과 대화를 도맡아했기에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장래 전해주어야 할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은 아이 또한 루치아였다. 성모님의 발현으로 세 아이는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루치아는 1921년 6월 17일 빌라르에 있는 성 도로테아 수녀원의 연수원에 들어가 종교교육을 받았으며 마침내 그곳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었으나 교황 비오 12세의 허락으로 1948년 3월 25일 가르멜 수녀원으로 옮겨서 오늘날까지 그곳에서 기도와 속죄의 생활을 하고 있다.

* 제로니모스 수도원 (Mosteiro dos Jeronimos)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기념을 위해 설립됐다. 리스본 시내 '떼주' 강변 벨렝(Belem) 지역에 위치.
* 벨렝탑 (Torn de Belem)
'떼주'강변의 옛 방위 요새, 제로니모스 수도원 앞에 위치한다. '지리상의 발견시대'에 배가 출항하였던 곳(starting point)이다.
* 발견기념탑 (Padrao dos Descobrimentos)
엔리끄(Henrique) 항해왕자 서거 500주년 기념차 1960년 설립된 발견 기념비, 벨렝탑 옆에 위치한다. 발견탑 앞은 떼주강을 향하고 있으며, 뒷 편에는 조그만한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는 포르투갈인들이 항해하여 도착하였던 세계 각지가 연도별로 표시되어 있어, 포르투갈인들의 발길이 머물렀던 곳들이 방대했음을 보여준다.
* 성 죠지성 (Castelo de Sao Jorge)
무어인에 의해 축조된 고성, 리스본 구시가지, 가장 높은 언덕 알파마(Alfama)지역에 위치하며 시내전경을 관망할 수 있다.
* 까보다 호까 (Cabo da Roca)
유라시아대륙의 최서단 지점, 리스본에서 차량으로 40분 거리. 해발 140m의 절벽 위에 있으며, 위치는 위도 38도, 경도 9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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